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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조선시대의 변호사 외지부;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며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어지럽게 하는 무뢰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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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사백쉰네 번째 이야기]
조선시대의 변호사, 외지부(外知部)
번역문
   무뢰배가 송정(訟庭)에 와 오래 버티고 있으면서 혹은 품을 받고 대신 송사(訟事)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부추겨 송사를 일으키게 하여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며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어지럽게 하니, 시속(時俗)에서 이들을 외지부(外知部)라 한다. 쟁송(爭訟)이 빈번해지는 것이 실로 이 무리 때문이니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 간교하고 거짓된 짓을 못하게 하라.
원문
無賴之徒長立訟庭, 或取雇代訟, 或導人起訟, 舞文弄法, 變亂是非, 俗號外知部。 爭訟之煩, 實由此輩, 所宜痛懲, 以絶奸僞。
-성종실록 9년 8월 15일(갑진)

해설
   조선에 변호사가 있었을까? 요즘처럼 로스쿨을 나와 정식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것과는 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소송을 대신해 주고 법조문을 거론하여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며 승소하면 그 대가를 받는 사람을 변호사라 한다면, 조선에도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외지부(外知部)’라 불렀다.

   ‘외지부’란 밖에 있는 지부(知部)라는 뜻인데, 원래 이 명칭은 장례원(掌隷院)을 도관지부(都官知部)라고 지칭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중종실록 5년 3월 26일(신사)』 장례원은 노비 문서와 노비 관련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사였다. 조선시대의 부(富)는 토지와 노비의 양에 달렸으므로, 당시에 이 관사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런데 장례원에 속한 관원도 아닌 일반인이 법률을 암송하며 문서를 위조하여서 송사하는 자를 교사하고 송사에서 이기면 자기가 그 이익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장례원 밖에 있는 지부 즉 외지부라 불렀던 것이다.

   중국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명률』에 “다른 사람을 부추겨 소송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소송문서를 작성하여 죄를 더하거나 줄여 다른 사람을 무고(誣告)하면 범인과 같은 죄를 준다.” 『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 교사사송(敎唆詞訟)』 라는 법조문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명률』에서는 소송을 대행한 이들이 재물을 받고 했을 경우에는 뇌물수수죄인 장죄(贓罪)를 적용하였고, 소송 과정에서 남을 무고하였으면 무고죄를 적용하였으며, 대행해 주었어도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송사를 판결하는 아문에 오래 버티고 있으며 사람들을 부추겨 다투어 소송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는 장(杖)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유배한다.”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 청리(聽理)』라고 못 박아 보다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오늘날의 변호사가 법률지식이 부족한 약자를 도와 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순기능이 있는 것처럼 당시의 외지부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법권을 가진 입장에서 볼 때 이들 외지부는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며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어지럽게 하는 무뢰배’로 비췄다. 그리하여 성종 9년(1478)에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들 외지부들을 함경도 변방으로 내쫓아버렸고, 대신 자제(子弟)나 사위, 조카와 같은 친인척이 송사를 대신하는 것은 허용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수금(囚禁)』

  그러면 성종 이후에는 외지부들이 모두 근절되었는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연산군 때도 외지부 16인을 변방으로 내치라는 명령이 보이고, 외지부를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1명당 면포 50필로 포상하고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장 100대에 유 3,000리로 처벌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보면, 이후에도 외지부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연산군일기 8년 4월 30일(신미)』

   근절은커녕 외지부는 오히려 권력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종 때 왕실에 속한 인물들이 외지부와 결탁하여 송사를 일으키고 이익을 도모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은 외지부를 끌어다 자기 집에 모아 놓고 송사하기를 좋아하니, 심히 좋은 일이 못 됩니다.” 『중종실록 14년 1월 10일(을사)』라는 기사나 “사천수(泗川守) 이호원(李浩源)은 ……해마다의 수교(受敎)를 능히 꿰뚫어 외고 있으므로 비리(非理)로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외지부 노릇을 합니다.” 『중종실록 29년 3월 14일(경진)』라는 기사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 이침은 성종의 아들이고 이호원은 태종의 증손이니, 다 종실(宗室)이다.

   어찌 보면 종실과 외지부의 결탁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수교라든가 법률 조문 등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이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이었으니 여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우선 글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복잡한 법률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고, 그때그때 결정되어 내려오는 법 즉 왕명에 대한 정보를 신속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거기다 종실은 과거를 볼 수도 관원으로 재직할 수도 없어 시간이 남아돌았을 테니, 종실 중에서 이권에 개입하여 송사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했을 것이다. 외지부가 권력과 결탁한 부정적 측면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외지부란 호칭은 선조(宣祖) 이후에는 사료에 보이게 않게 된다. 하지만 갈수록 소송의 빈도가 높아가고 격쟁(擊錚)과 상언(上言)이 난무하던 조선 후기에 백성들에게 변호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근절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송사를 판결하는 아문에 오래 버티고 있으며 사람들을 부추겨 다투어 소송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는 바로 외지부가 했던 역할이며, 이 조문이 『속대전』에 실려 있다는 것은 18세기 영조 때에도 이들이 존재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김진옥
글쓴이김진옥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주요 역서 및 논문
  • 『한국문집총간』해제 작성, 『일성록』 번역, 『조선왕조실록』 재번역 사업에 참여
  • 『金吾憲錄』의 자료적 가치, 『민족문화』36호, 2015
  • ‘推考’의 性格과 運用, 『고전번역연구』제3집,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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