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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악 정비와 광화문의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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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오던 고려시대의 전례를 일시에 바꾼다는 건, 권력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개혁과 보수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과 극심한 갈등을 겪게 마련이고, 때론 피의 쟁투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위에 인용한 태종과 황희 사이에 벌어진 짤막한 논란도 조선 초기 궁중의 예악(禮樂) 정비를 둘러싸고 불거져 나온 역사적 진통 가운데 하나였다.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을 무릅쓰고 권력을 쟁취한 인물이었던 만큼, 국가 전례를 개혁하는 데 있어서도 단호하면서 급진적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고려 궁중에서 사용하던 향악과 같은 ‘비루한’ 음악은 일체 금지하고 아악이나 당악과 같은 중국의 ‘고상한’ 음악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궁중의 각종 행사에 우리 전통의 음악은 금지하고, 서양의 클래식이나 팝송만 연주하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황희의 반대 논리처럼, 오랫동안 즐겨온 우리의 향악을 일거에 폐기해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친구들과 얼큰하게 술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 나훈아의 주옥같은 명곡을 부를 수 없다면, 어찌 제대로 된 흥을 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건국한 주역들이 그런 당연한 이치를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의 선진 문명을 배워 오고 싶어 안달하던 태종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조급증을 조금씩 누그러뜨려 갈 정도로 노련해졌으며, 뒤를 이은 아들 세종도 마침내 다음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했다.
되돌아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시대의 거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탁월함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담담하게 직시하되, 거기에서 남다른 깨달음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그러했다던가? 향악에 대한 세종의 깨달음도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부친 태종이 신하들과 어울려서 담뿍 취해 춤추며 놀던 모습을 자주 보았던 터, 아들 세종은 부왕을 그리는 제사를 지내면서 그분이 살아생전 즐기던 음악을 들려 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지극히 평범하지만 탁월한 깨달음. 성군(聖君)으로 기려지고 있는 세종의 비범함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세종은 태종 못지않게 중화 문명을 하루바삐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야만 ‘동방의 오랑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고 확신했던 임금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위에서 거론한 예악과 같은 전례(典禮)는 물론이고, 사회·정치·경제·과학·천문 등 국가운영 전반에 걸쳐 중국과 비교해 큰 손색이 없을 만한 수준으로 조선의 문명을 끌어올렸다. 그가 일군 업적 목록을 일별하노라면, 과연 지도자 한 사람의 역량이 이렇게 대단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점은 중국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어떻게 접목시키고 체화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풍토에 맞도록 조정한 농법을 담은 『농사직설(農事直說)』(세종 11년),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들까지 망라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세종 15년), 그리고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모두 그런 노력의 정화(精華)이다. 중국과 모든 점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한 가운데 그 문명을 어떻게 우리의 현실에 맞춰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분투의 결과였던 것이다. 우리가 세종대왕으로 치켜 부르며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광화문 앞 세종로에 기념비를 세워 기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세종은 요즈음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염원하는 촛불 시민의 물결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과 무슨 걱정을 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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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문(2.20), 사백예순일곱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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